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록펠러 공화당 (문단 편집) == 역사 == 록펠러 공화당의 시초는 1930년대 록펠러의 정계입문으로 볼 수 있다. 1944년과 1948년 [[해리 S. 트루먼]]에 맞선 공화당 대통령 후보였던 듀이는, [[로버트 A. 태프트]]가 이끄는 [[보수연합]]과 달리 뉴딜정책을 전면적으로 폐기하는 대신, 이러한 프로그램들이 [[시장경제|자유시장]] 원리에 부합하고 [[재정보수주의|재정적 지속성을 확보]]하게끔 개선하는데에 초점을 맞췄다. 군인 출신의 정치 신인인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의 경우, 원래부터 록펠러 공화당원은 아니었으나, 정치적 성향이 록펠러 공화당원들과 상당히 유사한 편이고, 이들의 지지에 힘입어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될 수 있었다. 이후 록펠러 공화당은 보수연합을 설득해, 공화당 전체가 아이젠하워를 중심으로 뭉치게 하는데에 성공했고, 결국 아이젠하워는 압도적인 표차로 대통령에 당선된다.[* 애초에 아이젠하워는 민주, 공화 양당에서 모두 영입제안을 받았으나, 특정 정당이 장기간 정권을 독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판단하에 오로지 정권교체를 목적으로 공화당을 선택한 사람이다. 실제로 그가 임기중에 추진했던 인종차별 철폐, 복지확대, 고속도로 건설 등의 정책을 보면 민주당 후보로 나와서 뉴딜의 계승자라는 포지션을 취했어도 별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록펠러 공화당은 193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공화당의 주류 계파 중 하나를 이뤘다. 그러나 1960년대 [[배리 골드워터]]의 우익 포퓰리즘과 신보수주의 운동에 기반한 정계개편, 특히 [[린든 존슨]]의 민권법 제정 이후 잃어버린 흑인 표심 대신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적 의식이 남아있는 남부 백인들의 표심을 잡기 위한 [[남부전략]]으로 보수화되었고 특히 강경파인 [[배리 골드워터]]의 영향으로 당이 우경화되면서 록펠러 공화당의 세가 급속도로 줄어든다. [[리처드 닉슨]]의 경우, 남부전략을 채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중국에 대한 전략적 유화정책 및 환경보호 등 일부 리버럴 의제를 채택하는 양다리 전략으로 남부지역의 지지율도 빨아들이고 북부에서도 나름대로 높은 지지세를 확보했다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하면서 한 동안 붕뜬 상태였는데 신보수주의파였던 로널드 레이건이 그 틈새를 잡으며 신보수주의자들이 완전히 주류화된것이다. 학자들은 1988년 상대적 온건파로 여겨졌던 [[조지 H. W. 부시]]가 보수적인 당론을 채택하고 세금에 대한 적대적 성향과 신자유주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록펠러 공화당의 정치적 종말을 알렸다고 평가한다.[* 원래 아버지 부시는 1980년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에서는 경쟁 후보였던 레이건의 감세를 통한 경기활성화 주장을 아무 근거도 없는 미신이라고 맹비난하는 등 중도적 입장을 견지하였다. 하지만 경선에서 패배하고 레이건의 부통령이 된 뒤에는 레이건노믹스 즉 신자유주의 노선을 전면적으로 수용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한다.] 또한 이후 적지 않은 록펠러 공화당원들이 탈당해 무당파가 되거나 [[청견연합]], [[신민주연합]]을 비롯한 온건파 민주당원으로 대체되었다.[* Lind, Michael. (2013) ''Up From Conservatives.'' p. 263][* 록펠러 공화당원들의 근거지가 주로 미국 북동부 지역이였는데, 이들은 현재 대부분 민주당 쪽으로 넘어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